[2018년 독서후기 공모전 장려상(지역민)] 5년 뒤에도 나는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 작성일2018/12/3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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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독서후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지역민 부문)을 수상한 김설님의 독서후기 '5년 뒤에도 나는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20년 전 필자는 학생의 신분으로 IMF를 경험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위의 잘 나가던 어른들이 한 순간에 직장을 잃었다. 더러는 직업까지 잃었다.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데 걸린 시간만큼,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한 입시 지옥의 시간을 견뎠다. 나 자신을 성찰하고 생애 전체를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직업 선택의 최우선 가치는 안정성이었고 그것을 보장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 과정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는 살아남아 있다.
필자는 전남의 한 공립초등학교 교사이다. 꽤나 만족스러운 직업이다. 만 63세라는, 비교적 긴 정년의 보장은 차치하고라도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을 요구하는 직업 내부의 도전은 필자를 긴장시키며 그만큼 성장케 한다. 그래서 필자는 나의 일이 ‘행운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향후 10~20년 내에 교사라는 직업이 사라지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참 여러모로 행운이고, 또 행복하다. 그런데 매일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는 나의 제자들도 행복할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학교만큼 미래 세대를 위해 긴 시간 동안 유․무형의 것들을 투자하는 곳은 드물 것이다. 또 학교만큼 그 투자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도 드물다. 선대의 지적 유산을 전승하고 미래의 창의적 인재를 육성한다는 투자의 목표는 분명하다. 목표 달성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학교가 길러낸 학생들이 생산 인구로서의 제 역할을 하고 다른 나라의 인재들과 겨루어 경쟁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그러한 기능을 다하였는지 평가하기에는 따져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국가 교육 정책, 교육 시스템이 운영되는 사회 구조, 선발 위주 입시 정책과 교육 본연의 기능과의 상충 등은 교육 하드웨어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따지게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교육의 선봉에 서있는 교사의 자질, 과거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들을 쌓아가는 학생, 그리고 그들의 이질성은 투자를 변수로 하는 효과의 방정식이 학교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쓰여야 함을 의미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의 치부를 들추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의 교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많은 지식인들과 교육 관계자들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우리 교육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을 뿐이다. 그보다 교사인 내가 나의 제자들, 미래 세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그것이 나의‘일’이 아니었던가.
저자는 물었다.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자신 있게 답하겠다. “5년 뒤에도, 아니, 10년, 20년 뒤에도 나는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미래에 학교라는 직장의 형태가 달라지고, 교육공무원이라는 직업의 형태가 달라진다 한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교감하는 ‘일의 DNA’는 인공지능이 쉽게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문제는‘어디에’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나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이것이 책을 읽고 난 후,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어떻게 하면 미래 환경에 적합한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 어떻게 가르쳐야 변화에 적응하는 힘이 길러질 수 있는가.
2015년 교육부가 고시한 2015 개정 초․중등 교육과정은 역량 중심 교육과정임을 표방한다. 학교 교육 전 과정을 통해 중점적으로 기르고자 하는 핵심역량들은 지식의 축적보다는 그것을 처리하고 가공하며 창조하는 인간 본연의 역할을 강조한다.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등의 핵심역량은 교사와 학생으로 하여금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느냐를 넘어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지식들을 저장해 놓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여러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조직하고 발현시키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처럼‘정해진 답을 맞히는 표준화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올리는 것이 지상목표인 사회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평가 시스템만으로 대변할 수 없는 교육의 잠재력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그럽게 기다려만 달라는 뜻은 아니다. 교사인 나부터 학생들의 발전 과정과 각기 다른 그들의 ‘DNA’를 정량적인 성적표가 아닌, 정성적인 피드백을 통해 교감한다면 교육에 대한 믿음이 쌓이지 않을까.
해마다 학생들에게, 또 학부모에게 학생 자신과 자녀의 진로 희망사항을 묻는다. 학생들은 유투브 크리에이터, 쇼콜라티에, 바리스타, 인터넷 BJ 등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모험적인 직업을 선호한다. 반면에 부모들은 공무원, 교사, 검사 등 그들 세대에서 각광받았던 직업을 가지기를 여전히 원하고 있다. 그들 직업이 미래에도 유망한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진로 희망의 척도는 현재의 관심사와 직업적 안정성 뿐이다. 뚜렷한 진로 희망이 없는 자녀가 걱정되어 상담을 요청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되도록 빨리 진로 목표를 정하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작용이다. 어떤 직업이 미래에 유망한지, 꿈이 없는 학생에게 어떤 목표를 심어줄지 등, 그것들에 대해 의사처럼 뚜렷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아야 유능한 교사로 여겨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지간히도 착각했다. 스스로 문제를 찾고 친구들과 협력하여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개별 학생들이 보여준 각자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나의 일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과 부모에게 진로 희망사항을 다시 물어야 하겠다. 어떤 직업을 희망하느냐고 묻는 것은 더는 의미가 없다. 그보다 학생 자신은, 또 내 자녀가 어떠한 삶을 영위하기를 희망하는지 물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람을 찾기를 원하는지, 남들보다 부유하기를 원하는지, 또는 이타적인 삶을 원하는지 등을 묻고 답해야 우리 학생들이 미래 사회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기는 어렵다. 교사인 내가 좋은 발판이 돼줘야 한다. 5년 뒤에도 내가 이 자리에 있고자 하는 이유이다.
5년 뒤에도 나는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20년 전 필자는 학생의 신분으로 IMF를 경험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위의 잘 나가던 어른들이 한 순간에 직장을 잃었다. 더러는 직업까지 잃었다.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데 걸린 시간만큼,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한 입시 지옥의 시간을 견뎠다. 나 자신을 성찰하고 생애 전체를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직업 선택의 최우선 가치는 안정성이었고 그것을 보장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 과정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는 살아남아 있다.
필자는 전남의 한 공립초등학교 교사이다. 꽤나 만족스러운 직업이다. 만 63세라는, 비교적 긴 정년의 보장은 차치하고라도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을 요구하는 직업 내부의 도전은 필자를 긴장시키며 그만큼 성장케 한다. 그래서 필자는 나의 일이 ‘행운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향후 10~20년 내에 교사라는 직업이 사라지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참 여러모로 행운이고, 또 행복하다. 그런데 매일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는 나의 제자들도 행복할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학교만큼 미래 세대를 위해 긴 시간 동안 유․무형의 것들을 투자하는 곳은 드물 것이다. 또 학교만큼 그 투자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도 드물다. 선대의 지적 유산을 전승하고 미래의 창의적 인재를 육성한다는 투자의 목표는 분명하다. 목표 달성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학교가 길러낸 학생들이 생산 인구로서의 제 역할을 하고 다른 나라의 인재들과 겨루어 경쟁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 그러한 기능을 다하였는지 평가하기에는 따져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국가 교육 정책, 교육 시스템이 운영되는 사회 구조, 선발 위주 입시 정책과 교육 본연의 기능과의 상충 등은 교육 하드웨어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따지게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교육의 선봉에 서있는 교사의 자질, 과거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들을 쌓아가는 학생, 그리고 그들의 이질성은 투자를 변수로 하는 효과의 방정식이 학교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쓰여야 함을 의미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의 치부를 들추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의 교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많은 지식인들과 교육 관계자들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우리 교육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을 뿐이다. 그보다 교사인 내가 나의 제자들, 미래 세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그것이 나의‘일’이 아니었던가.
저자는 물었다.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자신 있게 답하겠다. “5년 뒤에도, 아니, 10년, 20년 뒤에도 나는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미래에 학교라는 직장의 형태가 달라지고, 교육공무원이라는 직업의 형태가 달라진다 한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교감하는 ‘일의 DNA’는 인공지능이 쉽게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문제는‘어디에’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나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이것이 책을 읽고 난 후,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어떻게 하면 미래 환경에 적합한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 어떻게 가르쳐야 변화에 적응하는 힘이 길러질 수 있는가.
2015년 교육부가 고시한 2015 개정 초․중등 교육과정은 역량 중심 교육과정임을 표방한다. 학교 교육 전 과정을 통해 중점적으로 기르고자 하는 핵심역량들은 지식의 축적보다는 그것을 처리하고 가공하며 창조하는 인간 본연의 역할을 강조한다.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등의 핵심역량은 교사와 학생으로 하여금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느냐를 넘어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지식들을 저장해 놓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여러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조직하고 발현시키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처럼‘정해진 답을 맞히는 표준화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올리는 것이 지상목표인 사회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평가 시스템만으로 대변할 수 없는 교육의 잠재력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그럽게 기다려만 달라는 뜻은 아니다. 교사인 나부터 학생들의 발전 과정과 각기 다른 그들의 ‘DNA’를 정량적인 성적표가 아닌, 정성적인 피드백을 통해 교감한다면 교육에 대한 믿음이 쌓이지 않을까.
해마다 학생들에게, 또 학부모에게 학생 자신과 자녀의 진로 희망사항을 묻는다. 학생들은 유투브 크리에이터, 쇼콜라티에, 바리스타, 인터넷 BJ 등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모험적인 직업을 선호한다. 반면에 부모들은 공무원, 교사, 검사 등 그들 세대에서 각광받았던 직업을 가지기를 여전히 원하고 있다. 그들 직업이 미래에도 유망한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진로 희망의 척도는 현재의 관심사와 직업적 안정성 뿐이다. 뚜렷한 진로 희망이 없는 자녀가 걱정되어 상담을 요청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되도록 빨리 진로 목표를 정하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작용이다. 어떤 직업이 미래에 유망한지, 꿈이 없는 학생에게 어떤 목표를 심어줄지 등, 그것들에 대해 의사처럼 뚜렷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아야 유능한 교사로 여겨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지간히도 착각했다. 스스로 문제를 찾고 친구들과 협력하여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개별 학생들이 보여준 각자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나의 일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과 부모에게 진로 희망사항을 다시 물어야 하겠다. 어떤 직업을 희망하느냐고 묻는 것은 더는 의미가 없다. 그보다 학생 자신은, 또 내 자녀가 어떠한 삶을 영위하기를 희망하는지 물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람을 찾기를 원하는지, 남들보다 부유하기를 원하는지, 또는 이타적인 삶을 원하는지 등을 묻고 답해야 우리 학생들이 미래 사회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기는 어렵다. 교사인 내가 좋은 발판이 돼줘야 한다. 5년 뒤에도 내가 이 자리에 있고자 하는 이유이다.